지금은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의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다시 읽으며, 오래전 대학 강의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정확히 어떤 과목이었는지는 이제 흐릿하다. 아마도 19세기 영국문학 수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과목명보다 더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교수님의 강의 분위기와 문학을 대하는 태도였다.
특히 종강 무렵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확한 표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서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니 다함께 사진 한장 찍어두자는 말씀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그저 유쾌하고 따뜻한 격려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문학을 읽고 쓰는 일에 대한 교수님의 믿음이 담긴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도서 정보
- 제목: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저자: 장영희
- 출판사: 샘터
- 개정판 출간일: 2022년 7월 15일
- 쪽수: 344쪽
- ISBN: 9788946422179
문학의 숲을 천천히 거니는 책
교수님은 문학을 단순한 지식이나 시험 과목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작품 속 인물과 문장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조금 더 깊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셨던 기억이 남아 있다. 젊은 시절의 독서는 대체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었고, 문학 역시 공부해야 할 무엇에 가까웠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장영희 교수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북칼럼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를 엮은 문학 에세이다. 2005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개정판으로도 다시 나왔다. 이 책에는 고전문학에 대한 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에 대한 장영희 교수님의 따뜻한 해석이 담겨 있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은 문학을 ‘공부하는’ 책이라기보다 문학의 숲을 천천히 ‘거니는’ 책에 가깝다. 고전 작품들은 어렵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사랑과 상처, 고독과 희망, 절망과 용기를 비춰주는 거울처럼 소개된다. 장영희 교수님의 글은 결코 과장되지 않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쪽이 조용히 따뜻해진다.
불안한 시기에 다시 만난 문장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그리고 다시 책장에서 꺼내 읽은 것이 아마 2020년 봄이었던 것 같다. 그해 봄은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고 불안한 시기였다.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이 흔들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마저 새롭게 의식해야 했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다시 만난 장영희 교수님의 문장은 이상하게도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문학이 현실을 당장 바꿔주지는 못한다. 병을 낫게 하거나, 불안을 단번에 없애주거나, 세상의 부조리를 곧바로 해결해주지도 못한다. 하지만 문학은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힘이 있다. 누군가가 이미 오래전에 나와 비슷한 두려움과 외로움, 상실과 희망을 겪었고, 그것을 문장으로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로워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그런 문학의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암흑의 오지」와 오래 남은 이름, 콘라드
책에 실린 글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암흑의 오지」 편이다. 장영희 교수님은 이 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언급하며,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 즉 Heart of Darkness를 소개한다. 이 작품은 훗날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모티브가 된 소설이기도 하다.
조셉 콘라드는 폴란드 출신이지만 영어로 작품을 쓴 작가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경계에 서 있는 영국문학의 중요한 작가다. 대학 시절 장영희 교수님의 수업에서 내가 콘라드를 처음 접했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콘라드라는 이름과 『암흑의 오지』가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 시절의 수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사실 내가 블로그에서 사용하는 필명인 ‘콘라드’도 바로 이 조셉 콘라드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인상 깊게 남은 작가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이름 뒤에는 대학 시절의 문학 수업과 장영희 교수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이어져 있었던 것 같다. 한 작가의 이름이 필명이 되고, 그 필명을 쓰며 다시 책과 글을 가까이하게 된 것을 보면, 문학의 영향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암흑의 오지』는 단순히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풍경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폭력성을 묻는 작품이다. 장영희 교수님은 이 고전을 오늘의 현실과 연결해 읽어낸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이야기하면서, 오래된 문학 작품이 여전히 현재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이 바로 장영희 교수님의 글이 가진 힘이라고 생각한다. 교수님은 고전을 박물관 속 유물처럼 설명하지 않는다. 문학 속 이야기를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로 데려오고,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인간의 얼굴을 보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고전문학이 더 이상 어렵고 낯선 이름들의 목록이 아니라,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거는 살아 있는 문장처럼 느껴진다.
읽고 난 뒤 남은 생각
내가 비록 지금 시점에서 노벨상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교수님의 가르침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한 학생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어느 책의 한 문장, 어느 강의실의 기억, 어느 작가의 이름을 다시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가르침은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아남은 것이 아닐까.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내게 단순한 문학 에세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 강의실에서 만났던 한 스승을 다시 만나는 일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문학의 의미를 뒤늦게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문학은 삶과 동떨어진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우리가 흔들릴 때 잠시 기대어 쉴 수 있는 숲일지도 모른다.
장영희 교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설만이 아니다. 힘든 삶 속에서도 끝내 희망을 말하려는 태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문학을 통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시선이다.
마무리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참 잘 어울린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우리는 때때로 삶에서 길을 잃는다. 그럴 때 문학의 숲을 천천히 걸으며, 오래전 누군가가 남긴 문장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숲 어딘가에서, 오래전 강의실에서 들었던 선생님의 목소리도 함께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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